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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 심장 멈추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중국 하얼빈역 플랫폼에 총성 세 발이 울려 퍼졌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군사령관의 이름으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목숨을 거두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심장. 69년간 잠시 쉴 틈도 없이 신일본 경영과 동양 평화를 위해 힘차게 고동쳐 온 위대한 심장은 이제 홀연히 이역의 첫눈 내리는 아침에 그 박동을 영원히 멈추었도다('백회통신(百回通信)')." 사회주의 사상을 품고 있던 청년 문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조차 그날 쓴 추도문에서 '동양 평화'를 지키려 했던 위인으로 이토를 치켜세웠다. 언론들은 입을 모아 "이토 공의 죽음은 일본의 대손실만이 아니라 세계의 대손실"이라고 탄식했다. "그의 죽음은 세계에 대손실은커녕 일본에 작은 손실도 주지 않았다. 비명의 죽음에 동정을 보내고 죽은 자를 애석해하는 것이 인정이니 우리들도 이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를 넘어 광적으로 애석해하는 것은 대반대다('오사카곳케이(大阪滑稽)! 신문')." 이처럼 당시의 세태를 꼬집은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의 목소리는 귀 기울이기에 너무도 작았다. 한 해 뒤 일제는 이 땅을 식민지로 집어삼켰다. 이시카와는 감격에 겨워 이토의 죽음을 미화하는 단가 두 수를 지었다. "누가 총으로/나를 쏘았으면 좋겠다/이토 공처럼/진짜 대장부답게/죽어 보일 것이다." "그러하오만/당신같이/장렬한 죽음을 /내 또래 청년들은/모두들 원한다오." 그만이 아니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의 뇌리에 이토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아로새겨졌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 한국근현대사

2009-10-25

[그때와 지금]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1894년 두 차례에 걸쳐 전라도 일원을 뒤흔든 농민봉기를 이끈 녹두대장 전봉준. 그해 겨울 우금치 싸움에서 그의 부대는 끝내 패했다. 순창으로 몸을 숨겼던 그는 한 달여 만에 지방 민병의 손에 사로잡혔다. 황현은 그때 그의 언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어찌 함부로 다루느냐'고 했다. 잡아가는 자들이 이를 보고 '예예' 하며 잘 모셨다." 칼 찬 관군의 호위를 받으며 들것에 실려 가는 전봉준(사진)의 모습에서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일본공사관에 넘겨졌다. 이노우에 공사와 우치다 영사 그리고 법부대신 서광범 등 심문관들로부터 5차례 이상 취조가 이어졌다. 심문의 초점은 그가 농민군을 일으킨 것이 대원군의 지시 내지 사주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캐내는 데 맞춰졌다. 일본은 겉으로는 협조하는 체하면서 뒤로 반일 공작을 펼친 대원군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가 세간의 통념처럼 반봉건 농민전쟁을 이끈 혁명가였다면 왜 목숨 걸고 보수의 최고봉 대원군의 정치생명을 지켜주려 했을까?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와 그를 따라 떨쳐 일어났던 농민군들은 모두 철두철미한 애국자이자 원초적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들을 읽노라면 그때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들의 주장에 동감하기 어렵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청일전쟁이 터지는 기폭제가 되어 전봉준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에서 일본의 패권을 강화하는 역설을 범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23

[그때와 지금] 국제연합 출범 64주년…한반도 운명과 특별한 인연

10월 24일은 국제연합일이다. 1945년 10월 24일 안보리 5개국을 포함한 51개국의 동의로 헌장이 발효되면서 국제연합(UN)이 출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북한과 함께 국제연합 회원국으로 승인되었다. 한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데 43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한국은 1947년 이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국제연합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국제연합 소총회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UNTCOK의 감시하에 38선 이남만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제연합총회는 1948년 12월 한국 정부를 승인하고 유엔한국위원단(UNCOK)을 조직해 파견하였고 UNCOK의 보고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 조직과 파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국제연합의 깃발 아래 군대가 조직돼 파견된 유일한 사례였으며 소련의 안보리 불참이 유엔군 조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재 부산에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승인 시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서만 행정권을 갖는 합법정부로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한국 정부는 통제권을 갖지 못했다. 4.3 사건으로 1년 후에야 선거가 가능했던 제주도에서는 1949년 이후에 행정권을 갖게 되었고 수복지구는 전후 1년 넘게 행정권을 가질 수 없었다. 이는 통일 과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앞으로 한국 정부가 국제연합과 긴밀하게 논의해 나가야 할 사안이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2009-10-22

[그때와 지금] 청산리 대첩 빛나는 승리

1919년 3.1운동 당시 이 땅의 사람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독립을 갈망했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만으로 일제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새긴 이들은 무기를 손에 들었다. 1920년 10월 21일 중국 지린성 청산리 백두산 기슭 험준한 밀림지대 속 깎아지른 절벽 사이 골짜기로 향하는 오솔길 초입에 펼쳐진 개활지 백운평에 아침이 찾아들 때였다. 산허리와 절벽 위에 숨죽이며 몸을 숨긴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의 총구는 계곡 쪽으로 들어서려는 일본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이날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독립군 연합부대는 완루구.어랑촌.고소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맞붙었다. 청산리 대첩에서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적 우세였던 '무적 황군'을 상대로 독립군은 어떻게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오호라 3일간의 전투에 식량이 다 떨어져 대여섯 개 감자로 고픈 배를 겨우 채우고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능히 150여 리의 험산 밀림을 통행하되 터럭 하나만큼도 기운을 잃지 않았으며 전투 후에도 수천백 리 삼림과 눈밭을 지나며 동상을 입은 사람이 적지 않되 조금도 원망과 후회가 없었음은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한 바이더라'('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 지형과 지세를 잘 이용한 뛰어난 전술과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군 한 명 한 명이 품고 있던 불굴의 결사항전 의지가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우리 역사에 도돌이표는 없어야 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20

[그때와 지금] 나치의 인종차별 광기···현대과학 결론은 '인류는 하나'

1941년 8월 히틀러는 "유럽은 지리적 실체가 아니라 인종적 실체"라고 선언했다. 나치는 북유럽인을 포함한 이른바 아리안족만이 가장 완전한 인간이며 인류의 진보에 현저한 기여를 한 유일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히틀러가 구상한 '신질서'는 열등한 인종들의 위협을 억제하고 유럽에 독일적 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B형이 이민족의 특성을 가진 혼혈의 상징이며 순수한 아리안족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인종 연구의 역사는 선입견의 산물이었다. 유전학자들이 지구상의 다양한 지역에 살고 있는 인류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모두 동질적임이 밝혀졌다. 이토록 드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도 동질성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이 인류 조상들의 생활 조건과 그들의 유전자가 전해진 과정을 시뮬레이션해본 결과 인류는 아프리카 또는 서남아시아 특정 지역(아마 이곳이 '에덴'일 것이다)에서 기원전 15만~10만 년에 출현했다고 한다. 인구 3만 명가량이었던 '에덴' 거주자들이 기원전 10만 년께부터 '지구 대정복'에 나서 5개 대륙을 누볐고 그 결과 현대 인류가 있게 됐다. 아파트 같은 층에 살고 있고 혈액형이 다른 이웃 사람의 혈액보다는 자신과 같은 혈액형을 갖고 있는 아프리카 사람의 혈액을 받는 편이 더 낫다. 흑인.백인 유전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10-19

[그때와지금] 제 2차 아편전쟁, 베이징 조약…조선은 여전히 깊은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국에 아편을 갖고 가서 사서 피우라고 국민을 유혹한다면 여왕께서도 틀림없이 분노하실 겁니다." 1839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밀수를 막아줄 것을 호소한 임칙서(사진)의 편지에 영국은 군함의 포성으로 답했다. 아편전쟁(1840~42)은 두 나라의 무역에 대한 너무도 다른 생각 차이가 빚은 산물이었다. 청국은 무역을 세계의 통치자로서 천자가 이민족에 대해 일시동인의 정신으로 베푸는 은전으로 생각했다. 반면 영국은 국제사회의 공동이익과 부강발전을 도모하는 수단이자 국제법에 의해 보장되어야 할 모든 문명국가의 권리로 보았다. 그때 청국은 졌다. 청국의 쇄국주의는 무너졌다. 1856년 10월에 일어난 애로호 사건을 구실 삼아 영국은 주경권 확보와 통상권 확대를 목표로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1860년 10월 중화제국의 수도 베이징은 군홧발에 처절하게 유린되었다. 자금성은 불타올랐고 만주로 피신하는 함풍제를 태운 마차는 먼지를 뒤집어썼다. 공친왕은 영.불.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조약으로 양쯔강을 통한 내륙 진출이 허용되었고 공사관도 들어섰다. 서양세력의 우세를 뼛속 깊이 새긴 청국 지배층은 그들의 앞선 기술과 무기를 배우고자 양무운동을 시발하였다. 연해주가 러시아 손에 들어가자 열강은 공로증에 몸을 떨었다. 청국은 울타리를 잃은 뒤 겪게 될 순망치한의 두려움에 일본은 조선이 열도를 겨누는 서늘한 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으며 영국은 부동항을 확보한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뻗어 나올까 우려했다. 베이징조약이 맺어진 1860년 10월 우리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위기를 깨닫기에는 미몽이 너무도 깊었다.

2009-10-18

[그때와 지금] 유럽 부흥의 계기 마련한 레판토 해전 빛나는 승리

430여 년 전 유럽은 전투에서 이긴 뒤 엄청난 환호에 휩싸였다. 로마.마드리드.빈 등 유럽의 대도시들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레판토(지금의 나프팍토스) 앞바다에서 기독교도 함대와 이슬람교도 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의 승리로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이 전투는 기독교 국가들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수많은 화가가 앞다투어 승리를 축하하는 그림을 그렸다. 옆의 그림은 뒤엉킨 양측 함대 사이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투르크군을 그린 16세기 석판화다. 1453년 투르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기독교 문명권은 100년 넘게 실의에 빠져 있었다. 투르크인은 16세기 초에는 벨그라드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신성로마제국 수도인 빈 부근까지 세력을 뻗쳤다. 기독교 함대와 이슬람교 함대 쌍방은 수적으로 서로 비슷했고 그 용맹성에서도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우월한 리더십을 지닌 편에 돌아갔다. 돈 후안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4시간가량 치러진 해전에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병사 8000여 명이 전사했고 부상자는 그 두 배에 달했다. 그러나 투르크 함대의 전사자는 그보다 세 배나 되었다. 레판토 해전은 서유럽인에게 투르크 세력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오랫동안 투르크 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보이던 끝에 유럽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것은 길고도 지속적인 부흥의 시작이었다. 투르크는 이 해전에서 패배한 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기독교 문명권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10-16

[그때와 오늘] 이승만 망명 33년 만에 귀국, 좌우 모두 환영 성명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비행장을 통해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였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의 귀국이었다. 한국인들에게 독립협회부터 활동을 시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했던 이승만의 귀국은 희망의 메시지였다.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에서도 귀국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귀국 다음 날 이승만은 미군정의 하지 중장 아널드 소장과 함께 군정청(지금은 철거된 옛 총독부.중앙청 건물) 제1회의실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했다. 미군정은 10월 20일의 연합군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을 애국자로 소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지 입장을 적극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정회한 뒤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천명한 정읍 발언으로 인해 미군정과 불화를 겪었다. 결국 이승만은 46년 말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그는 워싱턴을 방문 미국 정계 및 군부 요인들을 만나 로비를 벌임으로써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선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그는 통일국가수립을 가로막은 '분단의 원인제공자'였는가.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의 궁극적 승리를 예견했던 '건국의 아버지'였는가. 아니면 정치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정치 9단'이었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2009-10-15

[그때와 지금] 고종 '대한제국' 선포···문화선진국 의지 국호에 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때 온 국민을 하나로 묶은 구호는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이었다. 그 무렵부터 국가대표 스포츠 대항전을 중계하는 TV 화면 상단에도 우리나라의 공식 국호인 '대한민국'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주로 '한국'이라고 썼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반세기 만에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데 대한 국민적 자부심이 국호에 대한 애정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리라.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이 우리 국호가 된 연유와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경운궁 대안문 정면에 새로 지은 환구단에 나아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자기들 나라 이름은 외자로 쓰고 인근 민족과 나라 이름은 두 자로 써왔다. 근세에 서양 열강과 접촉하면서부터는 이들 나라의 이름을 굳이 세 글자에 맞추어 미리견.영길리.불란서.노서아.오지리 등으로 썼다. 서양 열강의 침탈로 중화주의가 패퇴한 뒤에야 이들 나라 이름을 한 글자로 고쳐 불렀다. 주자학적 화이론(華夷論)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국은 당연히 외자 이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정한 '한(韓)'은 우리나라 고대의 국호 중 하나였다.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삼한'의 왕이 됐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대'는 당시 일본과 청국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기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보편 문화를 상징했으니 '대한'의 국호에는 문화 선진국을 향한 의지가 담겨 있었던 셈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을 선언한 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새로 건국할 나라의 국체와 국호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국체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입각한 민주공화제로 결정되어 '민국'으로 하였고 '한'을 그대로 승계했다. 1948년 제헌 헌법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하여 이때의 국호 승계를 헌법 전문에 명시했다. 3.1절을 국경일로 정한 것도 이날에 건국절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국호뿐 아니라 국기도 대한제국의 것을 승계했고 국가의 가사도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것 중 하나를 썼다.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대한민국관 건립 준비가 한창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2009-10-14

[그때와 지금] 역저 '조선사' 스스로 폐기한 '일본의 양심' 사학자 하타다

하타다 다카시(1908~1994)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소학교와 부산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7년간 이 땅에서 '식민자의 아들'로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 그는 일본은 문명 조선.중국은 야만이라는 차별 의식을 갖고 침략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길을 선택한 일본 제국주의의 추종자였다. 48년 12월 일본에 돌아온 그는 50년 6.25 전쟁을 계기로 자신에게 '청산해야만 할 빚'이 있음을 자각했다. "조선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조선 문제를 진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멸시감은 예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보고 조선사 연구의 필요를 통감했다." 51년 그는 (조선사)를 펴내 패전 이후 일본의 새로운 한국사 연구를 개척한 선구자로 우뚝 섰다. 이 책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지식인들의 타는 목마름도 달래주었다. "나로서 마음에 걸렸던 것은 자세나 평가를 개선해 가면서도 사실 인식에서 주로 패전 이전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체성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점 고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그대로 인정한 점 조선인의 문화적 창조력을 그려내지 못한 점 등 커다란 결함이 있었다."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축적된 1970년대 그는 "스스로도 읽는 것이 고통스럽고 사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조선사)의 절판을 결행했다. 40년 전인 1969년 이미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만이 아닌 시민사회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과거사를 성찰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한 '일본의 양심'이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13

[그때와 지금] '영어의 모든 것' 옥스퍼드 영어사전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은 전 세계에 유니언 잭을 휘날렸고 대영제국의 팽창에 따라 영어도 전 지구에 확대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문화적으로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에 뒤지고 있던 영국은 문화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영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57년 11월 5일 연설에서 시인이자 성공회 주교인 리처드 체네빅스 트렌치(1807~86)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 방침을 밝혔다. 편찬 방침의 핵심은 한 어휘가 태어나 성장하고 사라지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적 원리에 입각한(Based on Historical Principles)' 사전 편찬 방침이다. 트렌치는 어휘의 의미의 역사 즉 각 어휘의 일생을 펼쳐 보이는 사전을 구상했는데 그것은 영어로 된 '모든' 문헌을 읽어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보수를 받지 않는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가 작업에 참여했다. 1928년 초판(전 10권)이 완성되었다. 1884년 제1권이 간행된 뒤 44년이 걸렸고 트렌치 주교의 1857년 연설이 있은 지 71년 만의 일이었다. 1989년에는 2판(전 20권)이 간행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표방하는 '세계 최고의 사전'이란 수사는 전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9일 한글날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르며 자축했다. 하지만 정녕 세종대왕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맞먹는 우리말사전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박상익 /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10-12

[그때와 지금] 종교 넘어선 '헌신'…언더우드 타계

1916년 10월 12일 신촌 원씨의 시조 원두우(元杜尤 Horace G. Underwood)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을 지도하는 분들도 조선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글을 쓰고 있었다. 왜 너 자신이 스스로 가지 않느냐는 메시지가 제 가슴을 울린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기 직전 그는 오랜 꿈을 접고 미지의 땅 조선에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에 응답했다. "모든 교회는 선교사가 일하고 있는 선교현장에 현지 교회의 자급(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 자치(self-governing)를 추구하고자 한다.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우리 선교부는 결국 이 방식에 따라 교회를 더욱 확고하게 세워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 땅의 사람들 스스로 '그들의 교회'를 세우기를 마음 깊숙이 바란 그는 그 토대인 근대 문명도 자기 힘으로 창출하길 염원했다. 제중원과 세브란스의전을 통한 의료사업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 고아원 같은 사회사업 청년운동과 계몽활동 '한영자전'과 '한국어 문법' 간행과 같은 한글 근대화 작업 그리고 해외에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한국학 개척….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26세의 청년은 '타오르는 횃불'로 30년 동안 이 땅에 복음만이 아닌 문명의 빛을 비추었다. "거의 십 년간 이 나라의 선교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이에게 매혹적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나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읽었고 참으로 그것은 사도행전의 한 장과도 같았다. 개신교 선교사가 이 나라의 기독교 수용에 대한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없이 조선으로 파송된 지 아직 4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선교는 당연히 속도를 늦추어야 하며 직접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수년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갈림길에 선 조선' '한국선교현장' 1908). 어찌 보면 그가 펼친 근대문명의 씨앗 뿌리기 작업은 기독교 포교를 위한 터 닦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시절에 시작된 그의 교육.의료.계몽 활동은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씨뿌리기에 온 몸을 바친 그의 혜안이 밝게 빛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 근현대사>

2009-10-11

[그때와 지금] 경회루 지붕 수놓은 백열전등···연못에 비친 식민지배의 허상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은 8년 만에 1887년 경복궁에도 켜졌다. 1894년에는 창덕궁의 밤도 밝혔다. 그러나 문명의 빛이 궁정의 높은 담을 넘어 종로에도 깃든 날은 1900년 오늘이었다. "전차표 파는 곳을 보니 장안의 남자들이 아홉 시가 지난 후 문이 미어질 정도로 다투어 가며 표를 사서 일없이 갔다 왔다 한다." 제국신문은 그때 전차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히는 달랑 3개의 가로등 빛에 취한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한 해 뒤 동대문 발전소의 터빈이 돌아가자 진고개(충무로)와 혼마치(명동)에 늘어선 일본상점가는 600개의 전등으로 불야성을 쌓았다. 조선 사람들은 불빛에 홀린 부나비처럼 밤거리를 누볐다. 1920년대 서울은 이미 문명화의 표상 공간으로 진화했다. 이솝 우화 '서울 쥐 시골 쥐'처럼 '별건곤' 2호(1926)에 실린 희곡 속 서울사람은 촌사람에게 줄줄이 자랑을 늘어놓는다. "전차.자동차.인력거.자전거. 어디 다니려면 발에 흙 한 점 안 무치고요. 전신.전화.전등 등. 앉아서 100리 밖과 말하고 밤이 낮보다 밝소. 그러저런 기름불 등잔은 보고 죽으려야 없소." 쫓기는 삶의 실상을 말하지 않았던 서울 쥐처럼 서울사람도 전기 공급을 둘러싼 민족 간 차별을 말하지 않았다. 1934년 11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는 개탄한다. "남촌에는 가로등 시설이 완비되어 도회지로 손색이 없으나 대(大)경성의 중앙지대인 종로 일대는 아직까지도 가로등 하나 없다"고 말이다. 1930년대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은 여전히 어두웠다. 일제하 가정용 전기요금은 일본에 비해 30~40% 이상 비쌌지만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산업용은 턱도 없이 헐값이었다. 당시 촬영된 사진 속 경회루의 처마와 기둥을 휘감은 방울전구의 조명이 휘황하다. 그러나 수면에 비친 불빛은 망한 왕조를 잊지 못해 흘리는 회억의 눈물마냥 번져 흐른다(사진='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노형석 저 이종학 사진 생각의 나무). 일제 강점기 도회지의 밤을 수놓은 전등도 흐르는 강물에 떨어진 잉크 몇 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직후까지도 남한은 열 집에 한 집밖에 전등을 달지 못했다. 그때 동양 최대를 자랑한 수풍 수력발전소를 비롯한 발전 설비의 86%는 북녘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인공위성에서 본 한반도 야경은 남과 북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의 번영은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에 기댄 것이 아니다. 이곳저곳 밝게 빛나는 남녘과 달리 왕성(王城) 평양을 빼고 칠흑 어둠만이 짙게 드리워진 북녘 땅이 이를 증언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09

[그때와 지금] 부마 항쟁은 10·26 사건의 전주곡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은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마치 80년 5월의 광주를 예고하는 듯한 상황이 그 7개월 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78년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1.1%의 높은 득표율을 보였고 79년 8월 YH 여공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소용돌이의 직접적 발단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였다. 9월 16일 뉴욕 타임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김영삼은 이란에서의 재앙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에 의한 것이며 한국에서 주한 미국대사관이 유사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정부.여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10월 4일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정치적 파장이 커지자 미국은 10월 6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소환하였고 10월 13일 신민당에서는 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 상황에서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이 김영삼 총재 제명 반대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0일에는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시위는 진정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은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시위는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을 둘러싸고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경호실장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10.26 사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2009-10-08

[그때와 지금] 1895년 예방접종 '종두규칙' 제정···'공포의 호환 마마' 퇴치 시작되다

1895년 10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예방 접종 법령인 '종두규칙'이 내부령 제8호로 공포되었다. 접종 대상은 생후 7개월부터 만 1년 이내의 모든 소아와 두창(천연두)을 앓지 않은 성인이었다. 지석영이 부산의 일본인 병원에서 종두법을 배워 어린 처남에게 처음 접종한 것이 1879년이었고 인두법도 꽤나 알려져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은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마 귀신'은 잡귀 중에서도 특히 무서운 귀신이었다. 오죽하면 "호환(콜레라) 마마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왔을까. 두창을 몰아내는 '마마 배송굿'은 그 무렵 무당의 주수입원이었고 우두를 접종하는 일은 마마 귀신을 성나게 하는 일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마을에 우두의사가 나타나면 애 엄마들은 아이를 업고 산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러나 우두의 효과가 점차 입증되면서 자진해 접종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났고 종두법을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졌다. '종두규칙' 공포 한 달 뒤 '종두의 양성소 규정'이 만들어져 많은 종두의를 배출했다. 정부의 구상대로 모든 영유아에게 접종하지는 못했지만 두창은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 1908년 대한의원 교관 유병필이 황성신문에 게재한 우두기념취지서는 "지석영이 우두를 소개한 지 30년 사이에 우두가 전국에 널리 퍼져 대개 30세 이하 사람은 모두 두창을 면하여 인구가 전보다 많아졌을 뿐더러 길가에 얼굴 얽은 자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종두로 모든 전염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콜레라.장티푸스.말라리아.뇌염 등이 수시로 유행하여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전염병 말고도 죽음으로 이끄는 요소들은 너무 많았으니 삶과 죽음은 무척 가까웠다. 일상에서 죽음을 멀리 밀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한 세대 동안의 생활환경 개선과 의학 발달 덕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 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커졌다. 신종 플루가 예정된 여러 행사를 망치고 사람들의 인사 풍속까지 바꾸어 놓았다. 치사율 0.1% 미만의 전염병을 이토록 겁내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만큼 세상이 안전해진 때문일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2009-10-07

[그때와 지금] 명성황후 시해는 일제의 국가 범죄

1895년 10월 7일 새벽 훈련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다음 날 미우라 고로(1847~1926) 공사는 10일로 잡혀 있던 거사일을 앞당겼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성 전투에서 청국군을 물리친 뒤 일본 위정자들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굳혔다.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미국의 동의를 얻어 낼 최상급의 외교가 필요했으며 이를 자임한 이가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내무대신 자리를 내놓고 조선공사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이듬해 4월 23일 삼국 간섭으로 자신의 야망이 산산조각 날 위기에 몰리자 애가 달았다. 고종과 왕후가 러시아를 등에 업고 일본을 밀어내려 하자 궁지에 몰린 그는 두 해법을 모색했다. 하나는 왕후와 손잡고 이 땅을 러시아와 공동 지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왕후를 없앤 뒤 목표대로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그는 7월 21일 본국 정부를 설득해 청국에서 받은 전쟁 배상금에서 300만 엔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해 왕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이는 눈속임이었다. 그때 이미 그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왕후 시해를 공작하고 있었다. 그는 우익 낭인들을 동원해 10월 8일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의 구심점인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조선 보호국화)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달 14일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에게 보낸 미우라의 보고서는 이 천인공노할 범죄 행각에 국가 차원의 개입이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06

[그때와 지금] 유럽 통합의 원조 샤를마뉴는 문맹

캐나다의 스포츠 영웅으로 최근 상원의원에 임명된 자크 드메르(사진). 그는 4년 전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공개해 캐나다 사회를 놀라게 했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만 꼽는다면 단연 샤를마뉴(742~814)다. 분열된 유럽을 통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기 800년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2일 리스본 조약 비준동의안이 아일랜드 국민투표를 통과함으로써 정치통합이 가속화된 유럽연합(EU)도 따지고 보면 샤를마뉴의 유럽 통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됐다. 그는 1165년에 시성(諡聖)됐고 '성 샤를마뉴의 날'은 프랑스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일로 자리 잡고 있다. 엄청난 정력과 만족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가진 샤를마뉴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민의 교육 수준을 높이려 했고 단호한 의지로 학문을 부흥시키고자 했다. 중세 초기 서양은 지독한 문맹 사회였지만 샤를마뉴의 열정에 힘입어 그의 생전에 학문이 부활했다.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제국 영토 전역에서 샤를마뉴보다 더 열정적인 학생은 없었다. 자신이 주도한 개혁을 지속시키고 또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당대의 가장 명석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불러 모았다. 샤를마뉴의 궁정 학교는 국내외에서 초빙된 탁월한 학자들로 인해 바야흐로 명문 아카데미가 됐다. 자기 계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의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여가 시간에 글쓰기를 익히기 위해 침상 베개 밑에 늘 서판(書板)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열심이었음에도 끝내 글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문맹자였던 것이다.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가 얼마 전 아이스하키 팀 감독이자 해설가인 자크 드메르(65)를 상원의원으로 지명했다. 놀랍게도 그는 문맹자였다. TV 해설을 하면서 자료를 읽는 체 '연기'를 했고 심지어 부인에게도 문맹을 감췄다. 그는 2005년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스스로 공개해 캐나다 사회를 놀라게 했다. 어린 시절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도저히 글을 익히고 책을 볼 시간이 없어 학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맹을 고백한 후 알파벳 공부를 시작해 신문 읽기와 초보적 글쓰기도 가능해졌다. 그는 문맹 퇴치에 힘을 보태는 의정활동을 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학벌 공화국'인 우리 사회에도 이런 식의 인재등용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의 인간관.교육관에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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